맨유를 명문으로 만든 남자, 맷 버즈비

버즈비의 아이들과 맨유 삼위일체

맨유의 역사는 맷 버즈비 감독 부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맨유 감독 재임기간 중에 감독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고난과 최고의 영광을 모두 겪은 그는 단순히 맨유에 우승 트로피를 안겨준 감독이 아니라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맨유 고유의 정체성과 영혼을 불어넣은 감독 이었다.

맨유의 두 명장 중 현대 역사에 맨유를 무적의 함대로 만들어낸 퍼거슨 감독이 더 성공적인 감독이라면 버즈비 감독은 더 중요한 감독 이었다.

그가 맨유를 넘어 잉글랜드 축구계에 남긴 영향과 업적을 생각하면 그 주어를 맨유가 아니라 잉글랜드로 바꿔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는 잉글랜드 팀의 유럽대회 진출을 반대하는 풋볼리그의 지침에 정면으로 도전해 잉글랜드팀을 최초로 유럽 대회에 데리고 나간 주인공이자 자신이  리그 챔피언으로 키워낸 선수단의 8명이 사망하는 비극을 이겨내고 결국 당시 잉글랜드 클럽 최초로 유러피안컵 우승컵을 들어 올린 감독이었다.

당시 잉글랜드 축구계에서 그의 성공은 단순히 맨유의 성공이 아니라 잉글랜드 축구의 성공 이었다.

버즈비 감독 부임 이전의 맨유는 약 70년의 역사 동안 단 2차례  리그 우승과 1회의 FA컵 우승을 차지한  두 번의 파산위기를 맞고 수시로 1부리그와 2부리그를 오르내리는 팀 이었다.

그러나 버즈비 감독의 재임기간이 끝났을 때  맨유는 잉글랜드를  넘어 유럽 축구의 중심에 서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오늘날 맨유가 ‘명문’으로 불리게 된 것은 모두 그릐 덕분이었다.  그가 맨유의 역사를 완전히 바꿔놓지 않았다면 1980년대 에버딘 감독시절 이미 유럽대회 우승을 차지했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맨유 감독에 부임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그와 맨유의 인연은 그 시작부터 특이한 바가 있었다.

그는 맨유 감독에 부임하기 전 두 곳의 잉글랜드 프로팀에서 활약했고 그중 더 나중에 뛴 팀에서는 주장을 역임했는데 그 두 팀은 맨유와 가장 격렬한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주인공인 맨시티와 리버풀 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1945년 선수생활을 마친 그에게 처음으로 축구 지도자의 기회를 제안했던 팀은 리버풀 이었다. 실제로 그는 리버풀에서 당시 감독이었던 조지 케이 감독을 보좌하는 수석코치 역할을 제안 받았고 리버풀이 버즈비를 장래의 감독감으로 내다보고 있다는 언론의 보도도 이어졌지만 그는 감독직에 대한 확고한 철학이 있었다.

감독이 팀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컨트롤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오늘날의 축구계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다른 모든 팀들과 마찬가지로 리버풀에서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리버풀이 버즈비에게 코치직을 제안할 무렵  맨유는 새 감독의 임명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1902년 데이비스 구단주가  뉴튼힐스를 인수한후 새 이름을 고려할 때 맨체스터유나이티드라는 이름을 제안했던 맨유의 스카우터 루이스 로커는 맨유 구단 측에 새 감독 임명 건을 자기에게 맡기라고 당부하고는 버즈비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맨유의 운명을 바꾼 깁슨 구단주와 버즈비 감독의 만남은 1945년 2월 15일에 이뤄졌다.

깁슨 구단주와 만난 자리에서 버즈비 감독은 다음과 같은 사항을 요구했다.  선수 훈련지침, 선수선발, 선수 및 코치의 영입 및 방출에 대한 전권을 감독에게 줄 경우에만 감독직을 수락하겠다는 것

버즈비 감독에게 분명한 가능성을 본 깁슨 구단주는 그의 요구에 응했고, 그에게 3년 계약을 제시했다.

버즈비는 자신이 생각하는 비전을 맨유에서 이루기에는 최소한 5년이 필요하다고 요청하며 결국 5년 계약에 사인  맨유의 새 감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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